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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알려드립니다!

본 지명유래는 2006년 달서구사 간행 시 정리된 지명유래를 바탕으로, 2015년 학술용역 지명유래의 성과물을 첨가하여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2015년 학술용역 지명유래의 완전판 보기

감삼동(甘三洞)

『경상도읍지』에는 ‘감삼못’이 달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당못보다도 규모가 더 큰 못이었던 감삼못은 감삼동의 지명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역민들에게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못으로 전해지며, ‘우물제’라고도 불렸던 감삼못은 현 달성고등학교 일대에 있었으나 1970년대 중반 개발로 인하여 없어졌다.

감삼동의 지형을 보면 풍수지리적으로 세 장군이 태어날 형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이 널리 퍼지게 되면 도리어 마을 사람들이 해를 입기 쉽다하여 이 얘기를 숨기기 위해 그 부근에 샘이 세 곳에서 솟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이 마을에는 정말 세 곳에 샘이 생겨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그 샘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여 ‘감삼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샘이 있었던 세 곳의 위치는 현재의 감삼동 148-6, 190-2, 284-3번지이다.

한편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어느 날 원님이 이 지역을 지나가다가 시등(柿登, 현 감삼동 69-1번지 일대)에 있는 감나무에 달린 붉은 감을 보고 그 탐스러움을 감탄하였다. 이에 마을에서 인사차 나온 대표가 감을 원님께 대접하면서 마을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감이 매우 달고 맛이 있어 세 개나 먹었으니 ‘감삼동’으로 지어 부르게 했다는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도원동(桃源洞)

도원동은 골이 매우 깊고 그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다고 하여 ‘도원골’ 또는 ‘도원리’라 하였다고 한다. 한편, 냇가에 복숭아 잎과 꽃이 떠내려 와서 따라 올라가니 복숭아나무가 많이 있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복숭아 도(桃)자를 따서 ‘도원동’이라고도 한다.

수밭

‘수밭골’이라고도 불리는 수밭마을은 도원동의 가장 큰 자연촌락으로 마을 앞에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약 500년 전에 마을을 개척할 때 숲이 울창하다하여 ‘숲밭(수밭)’이라 하였다. 마을에는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고여 만들어진 작은 못이 있었다. 못의 이름은 마을 지명을 따라 ‘수밭못’으로 부르다가 후에 ‘도원지’로 개정하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원덕

원덕은 도원동의 수밭 북쪽에 있는 큰 자연촌락이다. 앞에 큰 둑이 있어 ‘원덕’으로 불렸다고도 하고, 대덕산의 큰 덕을 얻어 생겨났다고 하여 ‘원덕’이라 했다고도 한다. 또한 마을 앞에 큰 언덕이 있어 ‘원덕’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디기’, ‘원뚝’으로 불리기도 한다.

찬샘

일명 ‘찬샘’이라고도 하며, 옛날 할머니들이 보름이 되면 촛불을 켜고 액운을 없애고 무사함을 기원하던 장소로, 현재 이 지역은 도원동으로 대곡지구 택지로 개발되어 없어졌다.

두류동(頭流洞)

역사적 기록을 통하여 보면 두류동은 둥글게 펼쳐진 산의 형세에서 유래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대구읍지』에 의하면 두류산은 ‘주산(周山)’으로 나타난다. 그 산이 둥글게 펼쳐져 있다고 묘사하여, ‘두리산’으로 불렀다는 이야기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918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에도 두류산(頭流山)으로 표시되어 그 유래를 뒷받침하고 있다. 1930년에는 두류산을 ‘원산(圓山)’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산의 형세에서 유래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두류산의 유래라 전해지는 이야기가 두 가지 존재한다. 하나는 산의 형상이 사람의 머리와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모양을 하고 있어 불렸다는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 시대에 성당못 안골에서 역적죄로 처형된 머리[頭]가 성당못으로 흘러갔다[流]는 끔찍한 이야기이다.

땅골(당골, 안땅골, 바깥땅골)

당골은 두류 3동에 형성된 자연촌락이다. 현 낙동강수원지 앞 동북편 산 아래에 소나무 3그루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당산목이었다. 이에 당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골’이라 불렸는데, 당골이 경음화되어 ‘땅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 나무가 있던 동편 안쪽에 위치한 마을을 ‘안땅골(내당산)’이라 하였고 동남쪽(현 두류공원 야구장 서편) 아래 위치한 마을을 ‘바깥땅골(외당산)’이라 불렀다. 1887년 안땅골이 내당동이 되었으나 두류3동 일대는 지금도 ‘땅골’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5월 파종 후, 10월 추수 후에 술과 떡을 만들어 이 나무 밑에서 제(祭)를 올렸으며 이를 ‘당산제(堂山祭)’라 한다.

반고개

반고개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고개 반쪽이라는 의미로서, 옛날에 성내로 시집온 성외 출신 새댁이 명절 때 차마 친정에 갈 형편은 안 되고 안타까워 고개 반쪽쯤에서 성외로 시집간 성내 출신의 새댁들과 안부를 묻곤 하였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그리 고개가 높지 않은 고개라 하여 ‘반(半)고개’라 불렀으며, 이것이 구전되어 ‘밤고개’로 변형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곳 주민들은 이 고개 부근에는 오래전부터 밤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밤고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반(半)고개, 밤[栗]고개가 아닌 방(榜)고개에 대한 유래도 전해진다. 성서, 다사, 하빈, 성주, 고령 등지의 많은 주민들이 대구 서문시장에 드나들면서, 이 고개가 마지막 고개라는 의미로 ‘막쭉고개’라고도 했는데, 많은 사람이 드나들어 방(榜)을 붙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고 하여 ‘방고개’라 불렸다는 지역민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본동(本洞)

조선 중기 이후 대구의 방리로 존치되어 왔던 감물천면의 본동 지역은 일제강점기까지는 대구군(大邱郡)의 감물천면(甘勿川面)에 편재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매자동과 취령동, 구암리를 합하여 송현동이라 하였다. 1987년 본리동 일부를 남구 본동으로 법정동을 신설하고, 1988년 달서구를 신설할 때 본동을 편입하였으며, 1990년 달서구 송현2동을 송현2동과 본동으로 분동하였다.

가무내[甘勿川]

1470년부터 여산 송씨가 거주하기 시작한 이 마을은 동남쪽에는 당산 또는 학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큰 갓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마을 중심부로 작은 하천을 이루며 흘러 내렸다. 이 개천은 수질이 좋지 않다고 하여 ‘감물내[甘勿川]’ 라고 불렀는데, 이 ‘감물내’가 변하여 ‘가무내’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가뭄이 들었을 때 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하여 ‘가문내’라 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가무내로 변했다고도 한다. 가무내는 ‘가매실’ 또는 ‘가매설’로도 불리기도 한다.

감천리(甘泉里)

감천마을은 가무내 서쪽에 있던 자연촌락이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이 마을 한가운데에 샘을 팠는데, 심한 가뭄에도 샘물이 마르지 않을 뿐더러 물맛이 차고 달아 샘 이름을 ‘감천(甘泉)’이라 불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이 마을 이름을 ‘감천’으로 불렀다고 전해온다.

학산(鶴山)

학산(鶴山)은 지금의 본동(本洞) 앞에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산이다. 예부터 ‘가무내’의 마을 이름을 따서 ‘가무내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근래에 와서 산의 생김새가 마치 학이 날아와 앉은 형상과 같다고 하여 ‘학산’으로 불리고 있다.

본리동(本里洞)

『대구읍지』에 의하면, 원래 대구부 감물천면(甘勿川面) 지역으로, 1914년 감천리(甘川里) 작촌동(鵲村洞)을 합쳐 본리동이라 하고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시켰다. 이후 1981년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1987년 본리동 일부를 분리하여 본동을 신설 하고, 월성동 일부를 본리동에 포함시켰다. 1988년 달서구가 신설되어 달서구로 편입되었다.

작촌(鵲村)

작촌의 지명은 까치와 관련이 있다. 마을 뒤 언덕바지에 까치들이 떼를 지어 살면서 때때로 인가에까지 내려와서 짚뒤주나 뜸뒤주에 둥지를 틀고 살았는데, 이에 마을 뒤 언덕바지를 ‘깐치말등’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까치마을인 ‘작촌’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루지(地漏地)

감물천면의 행정중심지는 가무내(현 달서구 본동)였고, 면 주민들이 리(里)에 내왕할 때 감물내 냇길이나 질등(지리등)을 거쳐서 지루지 마을 앞을 지나다녔다. 이에 사람들이 거쳐 지나가는 길목이라 하여 ‘질우지’이라 불리기 시작하여 명칭 자체가 연음화 되면서 ‘지루지’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충적평야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 주위가 비가 오면 몹시 질퍽해졌는데 길이 질퍽하다하여 ‘지루지’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또한 까치를 길한 새라하여 새의 옛말인 ‘우지’의 음을 따서 한자로 ‘宇地’라 쓰고 ‘길우지(吉宇地)’라 했는데, 연음되어 ‘지루지’라 불렸으며 ‘작촌(鵲村)’의 속명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상인동(上仁洞)

상인동의 지명은 ‘우리못’이라고도 불리는 ‘상인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상인못이 있던 지역은 상인동, 하인못이 있던 지역은 하인동으로 불렸다는 지역민의 증언 역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도두뱅이 산 앞에 있던 하인못은 ‘신못’ 혹은 ‘신제’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 상원고등학교 자리이다. 지역의 ‘상인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며 상인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그 근거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달비골(달배골)

언제부터, 어떠한 연유로 ‘달비골’이라 불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달’이란 말은 ‘하늘의 달’이란 뜻과 함께 ‘산’이란 말이고, ‘비’는 ‘바위’란 뜻이니 이를 합치면 ‘산바위’ 혹은 ‘달 같이 생긴 바위’란 말이 된다. 이곳을 둘러싼 주변 지역의 지명 가운데 ‘월배(月背)’란 지명과 ‘월암(月岩)’이란 지명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달비’란 말의 이두식 표현이다. 이 지역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달비골’과 관련된 전설은 고려 태조 왕건 때까지 올라간다.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동수대전에서 대패한 왕건이 이곳저곳을 거쳐 현재의 대덕산 임휴사 자리까지 와 잠시 쉬고 있을 때, 당시 마침 보름쯤이었던지 크고 둥근 달이 떠올라 앞을 바라보는 자신의 등 뒤를 비추어, 등 뒤에서 달이 비추는 골짜기라 하여 ‘달배[月背]골’이라 칭하였는데, 경상도식 호칭이 가미되어 ‘달비골’이 되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이 계곡의 골이 너무 깊어 달이 뜨면 달빛이 계곡에 비춰진다 해서 ‘달비골’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달배[月背]골’로 변하고 이것이 다시 ‘월배(月背)’로 변하여 현재의 ‘월배’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말에 의하면 개발되기 전 지금의 달비약수탕 근처에 큰 바위가 집단으로 많이 있었는데, 나무꾼들이 나무짐을 지고 이 바위 사잇길로 몸을 비틀면서 빠져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큰 바위돌이 이 골짜기의 특징으로 달배골의 달배는 큰돌바위의 고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월촌(月村, 안마)

월촌은 달비 북쪽에 있던 마을로 조선 선조 때 의병장 월곡 우배선이 살았다. 정략장군 우전(禹奠)이 정도전 일파의 정치적 보복을 피하여 낙향하던 당시에 그들을 비추던 달이 유난히 밝게 비추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월촌’이라 하였다. ‘안마’라고 불리기도 하며, 단양 우씨들이 많이 세거하고 있는 집성촌이다.

임휴사(臨休寺)

고려 초기 921년 창건된, 대덕산 달비골 중턱에 있는 절이다. 927년 고려태조 왕건이 팔공산에서 견훤과의 격전 끝에 대패하여 반야월과 안일암을 거쳐 이곳에서 임시(臨時)로 쉬어갔다 하여 유래되었다.

성당동(聖堂洞, 성댕이, 상댕이)

『세종실록지리지』와 『경상도읍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당못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그 크기가 제법 큰 제방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성당동의 지명은 성당못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성당동의 지명은 ‘상댕이’ 또는 ‘성댕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부터 ‘성당’, ‘성당리’라 불렀는데, 길지로서 인명의 피해가 없는 좋은 땅이란 뜻으로 불렀단 이야기와 성당못을 중심으로 한 산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어서 성당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송현동(松峴洞)

송현동은 본래 대구부 감물천면의 지역이다. 이 지역에 솔고개[松峴]가 있었기 때문에,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취옹골

1300년경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제일 먼저 살던 곳이라 하여 ‘취옹골’ 또는 ‘취영골’ 이라 불려졌다.

신당동(新塘洞)

신당동은 1910년부터 새로 당산제를 올렸는데, 이때부터 이 마을을 신당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마을의 형태와 관련된 지명유래도 전해진다. 예전에는 큰 비가 올 때마다 홍수가 나서 농토가 황폐해지고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기에 걱정하던 차에, 1760년 가선대부(嘉善大夫) 김악소(金岳素)가 재물을 희사하여 마을의 침수피해를 막기 위해 마을 앞에 ‘섬둑’이란 보(洑)를 쌓았다. 이 때 마을에서 앞을 보면 보에 가득한 물이 마치 못[塘]을 막은 형상과 같아 보여 마을 이름을 신당(新塘)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온다.

범어, 강창(江倉), 파산동(巴山洞), 파호동(巴湖洞)

1270년 경 한씨(韓氏), 박씨(朴氏)가 이곳을 개척하여 범어, 강창이라 불렀다. ‘범어’라는 것은 강에 물고기가 많이 뛰어올라 뜬다고 하여 칭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고, ‘강창’은 이후 조선조 대구지역 조창이 있던 지역으로 ‘강창(江倉)’으로 꾸준히 이름이 불리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창 일부를 파산, 파호로 분리되어 파산(巴山)의 파(巴)와 인근을 흐르는 금호강(琴湖江)의 호(湖)를 따서 ‘파호동(巴湖洞)’이라고 불렀다.

호림동(狐林洞)

한복판에 숲이 홀로 우거져 있다고 하여 500여 년 전에는 ‘홀림(笏林)’으로 일컬었다는데, 그 후 1730년경 마을 앞 당산 느티나무 밑을 지나던 과객이 ‘홀(笏)’ 자가 좋지 못하다고 하여 여우전설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호(狐)’ 자를 써서 ‘호림’으로 개칭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용산동(龍山洞)

용산동은 와룡산 밑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용산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용산동을 비롯한 이 일대의 지명은 와룡산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와룡산(臥龍山)

와룡산의 명칭 유래는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산 아래의 옥연에서 용이 나왔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편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와룡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용과 흡사하여 그 머리는 서북단에, 꼬리는 북동단에 두고 몸체는 양쪽으로 굽혀 누워있는 것과 비슷하다는데서 나왔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중국의 이여송이 원병을 왔을 때, 우리나라에 훌륭한 명장과 인재가 많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 이름난 명산의 맥을 잘랐다고 하는데, 와룡산의 맥을 자르니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또한 대구의 분지가 형성될 때 팔공산이나 비슬산 등 주위의 모든 산은 그 지세가 대구 분지를 향하여 뻗어 있으나 오직 와룡산만은 용이 등을 대구로 향하여 돌아누워 있는 형상을 보이므로 역산(逆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월성동(月城洞,상동)

월성동은 본래 대구부 조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자연촌락인 일리와 광수동을 합하여 ‘상동(上洞)’이라 하였다. 이는 조암면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정한 동명이다. 이후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 되었다가 1957년 대구시에 편입되었는데, 대구시 수성구의 상동과 이름이 같아서 새 이름을 지었다. 이 때 월배면과 달성의 이름을 따서 ‘월성동’이라 하였다.

대천동(大泉洞, 한샘)

월배들 가운데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큰 샘이 있었는데 맑은 물이 항상 넘쳐흘러 그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그 샘이 큰 샘이라는 뜻으로 ‘한샘’, ‘대천’, ‘한천’, ‘복샘’ 등으로 불렸는데, 마을 이름 또한 ‘한샘’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이 지역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이 추진되어 자연마을은 없어지고 근래까지 ‘한샘’이 공장터 내에 있었으나 공장이 개발되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월암동(月岩洞,하동)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리와 개상동을 합하였는데, 이곳이 조암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동(下洞)’이라고 하여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시켰다. 1957년 대구시에 편입되었으나, 대구시 수성구의 하동과 동명이 같아서 그 혼동을 피하여 월배면과 조암의 이름을 따서 ‘월암동’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암(영암)

조암은 월암동의 바위이면서 이 일대의 자연촌락이다. 그 유래의 차이에 따라 한자표기에 다양한 이칭이 존재한다. 볏섬과 같은 모양의 바위라 하여 ‘조암(租岩)’으로 불렀으며, 또한 바위에서 낚시를 했다하여 ‘조암(釣岩)’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영험이 있는 바위라 하여 ‘영암(靈岩)’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경상도읍지』에서 그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가 넘어지거나 기울어지면 마을에 소가 죽는 등, 화가 미치고 액운이 닥친다고 믿었다. 그래서 돌이 넘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웠고,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엔 부녀자들이 돌 주위에 촛불을 켜고 행운과 번영을 빌어 왔다고 전한다. 조암은 총 7개의 바위였으나, 현재는 3개의 바위만 전한다. 2개는 월성․월암동의 도랑에 돌다리를 만들면서 2개를 사용하였는데, 새마을운동을 시행하던 당시에 시멘트로 복개하면서 없어졌고, 2개는 공업지역으로 개발하면서 묻혀버렸다고 한다.

이곡동(梨谷洞)

이곡동은 와룡산 밑자락에 있는 마을(성서 동서‧서한아파트 북편)에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배골[梨谷] 또는 배실이라고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곡동으로 하였다.

갈산동(葛山洞, 갈미)

갈산동은 흔히 갈미라고 한다. 마을 뒷산에 칡나무가 많아 칠뫼가 갈(葛)뫼로, 다시 갈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갈나무(떡갈나무)가 많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선원마을

김해 허씨(金海 許氏) 허재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한 이후 허씨(許氏) 집성촌(集姓村)이 이루어졌는데, 이 마을의 이름은 이곳 출신인 상무헌 허득량(尙武奸 許得良)의 스승이었던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의 호를 따서 선원마을이라 했다.

장기동(長基洞)

400여 년 전, 구씨(具氏)와 장씨(張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구씨, 장씨의 터라하여 구장터라 불렀다고 하며, 그 후 100여 년 뒤 구씨는 대부분 떠나고 장씨가 마을을 이끌어 왔다고 하여 구자(具字)가 빠지고 장씨 터라는 뜻의 장기(張基)로 불려졌다.

장동(壯洞, 장골)

임진왜란 당시 죄 없는 서민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는데, 격분한 허옥이란 사람이 큰 옥(玉) 자물쇠를 힘껏 내려치니, 통로 바닥 통나무가 갈라졌다고 한다. 이 사람이 1620년경부터 이 마을에 살게 되자 씩씩한 장정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장골[壯谷]’이라 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죽전동(竹田洞)

죽전동에는 예전 50가구 정도의 주민이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부업으로 대나무 갈퀴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이들이 만든 대나무 갈퀴는 서문시장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렇게 대나무 갈퀴를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 하여 ‘죽전(竹田)’이라 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도시개발이 이루어지기 전 1970년 만해도 이 마을에 큰 대밭이 있었고, 그 옛날에도 마을 안 빈 집터에 대나무밭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진천동(辰泉洞)

옛날 진천동에는 4개의 자연촌락인 오복촌, 새악단(새각단), 송정동, 용천동이 있었는데, 용천동의 순우리말 표현인 ‘미리샘’을 한자로 변용하면서 ‘용 진(辰)’과 ‘샘 천(泉)’을 사용하여 ‘진천’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대곡동(大谷洞)

대곡동은 본래 ‘한실’이라 불리어 졌는데 ‘갈밭[葛田]’과 ‘새악단(새각단)[新村]’으로 나누어져 내려오다가 행정동명을 정리할 때 대곡동이 되었다. ‘한실’이란 ‘큰 골’ 즉, 골이 깊고 크다는 뜻이며, 한실의 ‘한’의 뜻은 ‘크다’, ‘넓다’로 한자로 표기하면 ‘大’이고, ‘실’의 뜻은 ‘마을, 고을’이란 뜻으로 한자의 ‘谷’이다. 즉, ‘한실’은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곡’이 되었다.

용천, 미리샘

진천동은 용천동이라고도 불려졌다. 용샘, 미리샘, 진천 등 용천마을의 다른 이름은 모두 ‘용샘’과 관련되어 있다. 지명이 유래된 ‘미리샘’, 즉 ‘용샘’은 마을의 남쪽에 있던 샘으로 옛날에 미리(용)가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물이 많아서 큰 가뭄에도 줄지 않으며, 물이 매우 차서 땀띠에 좋다고 전한다. 용샘은 용천마을의 서쪽 가장자리에서 다소 벗어난 농지에 위치하였는데, 현재 그곳에는 선사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용천계’가 수백 년 이어져 오고 있으며 용천계 기금으로 정월 대보름에 동제(당산제)를 원형 그대로 지내오고 있다.

유천동(流川洞)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가 있어서 ‘흐르내’ 또는 ‘유천’이라 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흐르내’, ‘미리내’, ‘용천’으로도 불리는 ‘유천’은 비슬산(毖瑟山)의 동북단을 기원(起源)으로 달비골을 상류(上流)로 하고 달비골과 수밭골이 만나는 지점을 하류(下流)로 하여 두걸도랑으로 흘러 내려간다. 총 길이가 11㎞에 달하며 원래 이 내는 수원이 풍부한 대덕산과 청룡산의 줄기에서 흘러내려 오기에 연중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어 유천(流川, 흐른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월배에서는 가장 큰 내이고 타지역에서도 유천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천천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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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자료수정일
2021.02.15